| 관리번호 | 123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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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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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燦 |
| 이명 | 金庸屹, 金男 | 성별 | 남 |
| 생년월일 | 사망년월일 | ||
| 본적 | |||
| 운동계열 | 만주방면 | 포상년도 | 1977 | 훈격 | 건국포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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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번 | 성명 | 이명 | 출신지 | 관련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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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김찬 | 김용흘(金庸屹), 김남(金男) | 함경남도 북청(北靑) | - | |
| 본문 |
1884년 5월 21일 함경남도 북청군(北靑郡) 하차서면(下車西面) 일구대(日丘坮)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김용흘(金庸屹)·김남(金男)이 있다. 도만(渡滿) 경위는 자료의 한계 상 알기 어려우나 1919년 중반 서간도(西間島) 창바이현(長白縣) 17도구(道溝)에서 윤덕보(尹德甫)·이희삼(李熙三) 등과 대한독립군비단(大韓獨立軍備團)을 설립하였다.창바이현은 함경도와 마주한 국경 지방이다. 경술국치를 전후한 시기부터 많은 함경도지역 민족운동가들이 이 곳으로 건너갔다. 나아가 1919년 만세운동을 거치면서 민족 의식이 고조되자 이들이 중심이 되어 군비단을 설립하였다. 설립 초기에는 참모장에 선임되었다. 1919년 11월 경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협의해 조직이 재정비되자 총무장이 되었다. 단장은 이한평(李漢平)이었고, 그 아래 재무·경무·외교 등의 부서가 편제되었다. 이때 창바이현 8·13·15·18도구 등에 지단(支團)과 지부(支部)를 배치하고 16도구 신창동(新昌洞)에는 통신사무국을 설치했다.이 같이 짜임새 있는 조직을 갖춘 군비단은 험난한 창바이현의 지리를 십분 이용해 활발한 항일무장활동을 전개하였다. 소속 독립군들 또한 다수가 함경도 출신이어서 국경지방 지리에 밝았다. 따라서 군비단에서는 많은 유격대를 편성해 수시로 함경도와 평안도를 목표로 한 국내진공작전을 펼쳤다.활발한 무장활동을 펼치기 위해서는 다수의 독립군이 필요하였다. 이를 위해 창바이현 깊숙한 계곡에 농장을 만들어 이를 경영하는 것으로 위장해 한인 청년들을 모아 군사 훈련을 시켰다. 중국 측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농장으로 위장했던 것이다.1921년 4월 경에는 경호대장이 되어 본부가 있는 창바이현 17도구에서 활동하였다. 1920년 10월부터 2만 명에 이르는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경신참변이 1921년 4월까지 이어졌다. 이들 일본군의 공격을 경계하기 위해 본부 경호 임무의 책임자가 되었던 것이다.경신참변 이후 군비단은 일부 병력을 연해주로 이동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이 병력의 군무부장에 임명되어 연해주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이후의 활동상에 대해서는 확인되지 않는다.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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