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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 4월 15일 함경북도 경원군(慶源郡) 경원면(慶源面) 송천동(松川洞)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한자가 다른 황병길(黃丙吉)을 사용하였다. 부친은 황오섭(黃五燮)으로, 소작인 집안에서 태어나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1908년 이전 중국으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1907년부터 이범윤(李範允)·엄인섭(嚴仁燮)·최재형(崔在亨) 등과 함께 의병으로 활동하였다.
1911년 신해혁명 당시 조직된 순치동제당(脣齒同濟黨)이라는 중국인 단체와 연결되어 백규삼(白奎三)·양하구(梁河龜)와 함께 활동하였다. 같은 해 12월 러시아 연해주에서 훈춘현(琿春縣) 숭례향(崇禮鄕) 연통랍자(煙筒拉子)로 이주하여 훈춘 순경국에 고용되었다. 이때 윤해(尹海)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독립운동을 논의하고 다시 훈춘으로 돌아올 때, 윤해를 훈춘 순경국에서 호위하였다. 김관수(金寬洙) 의병부대가 훈춘에서 활동할 당시 편의를 제공하고 안전한 활동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한편 훈춘현 지사 펑슈탕(彭樹棠)이 일본 세력의 확대를 저지하기 위하여 만주로 이주한 한인(韓人)을 귀화시키고자 하였다. 이때 독립운동을 수월하게 수행하기 위하여 중국 측과 협조를 유지하였는데, 여기에 불만을 가진 혼춘영사분관에서 1912년 9월 펑슈탕에게 해고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이동휘(李東輝)의 영향으로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이문필(李文必)·박우삼(朴遇三) 등과 함께 기독교인을 통합하여 지방청년교육을 실시하기 위한 학교 설립을 추진하였다. 1912년 6월 자택에서 교인 모임을 열고, 1913년 12월 기독교교우회를 결성하여 회장에 취임하였다. 1914년 1월 20일 『기독교교우회보』를 창간하여 국제정세와 독립운동의 상황을 알렸다. 기독교교우회를 활용하여 군자금 모집에 힘썼다.
장업회(將業會)에서 훈춘현 책임자로 선임되었다. 또한 훈춘 기독교교우회 부속학교 설립을 추진하였다. 학생 수는 40여 명에 달하였으며, 주로 군사 교육을 실시하였다. 수분대전자학교(綏芬大甸子學校) 운영에도 관여하였다.
이동휘·이동춘(李同春)·김영학(金永學) 등과 함께 애국저금단(愛國儲金團)을 조직하고 본부를 둥닝현(東寧縣)에 설치한 후, 군자금 모집과 무기 공급을 위해 활동하였다. 또한 군자금 모집과 무기 구입을 위해 훈춘의용대(琿春義勇隊)를 조직하였다. 이때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대원 46명을 지휘하여 주로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전개하던 중, 1917년 10월 훈춘영사분관에 붙잡혔다. 1918년 1월 7일 훈춘영사분관에서는 친일선전에 활용하고자 고향인 경원군으로 데리고 가 헌병대·수비대·군청 등을 방문하게 하였다. 당시 훈춘영사분관에서는 이주 한인들을 친일 세력으로 전환시킬 목적으로 독립운동가들에게 시찰이라는 명목으로 관광을 권유하였다. 1918년 4월 11일 훈춘조선인공회장 김명호(金明浩)와 부회장 조익형(趙益亨), 독립운동가 한형권(韓馨權)·문병호(文秉浩)·양하구 등과 함께 5월 서울 시찰단에 선발되었다. 이 과정에서 건강을 문제로 관광단에서 빠지게 되었다.
1919년 3월 이명순(李明淳)을 비롯한 북일학교(北一學校) 교장 양하구와 교사들에게 독립운동에 관한 서면을 보냈다. 같은 해 3월 20일 오후 1시경 700여 명의 한인들과 함께 훈춘영사분관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또한 훈춘 지역에서 방두원(方斗元)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독립선언을 한 후 영사분관의 한인 순사와 밀정을 처단하고 한인 마을에 태극기를 만들게 하였다.
만세시위의 한계를 느끼고, 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실행하기 위하여 박치환(朴致煥) 등과 함께 건국회(建國會)를 조직하였다. 건국회는 무기 구입과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였다.
일제의 탄압에 대응하기 위하여 조직된 한일결사대의 훈춘 지역 책임자를 맡았다. 1919년 4월 17일 노종환(盧宗煥)에게 대황구(大荒溝)에서 4월 26일에 독립운동 관련 회의를 열 것을 명하였다. 이에 노종환은 100명을 선발하여 군자금으로 각 호당 20루블을 모금하고자 하였다.
나정화(羅正和)와 함께 대한국민회 훈춘지부를 조직하여 군자금 모집의 조직화에 힘썼다. 대한국민회 회원 중 150명을 선발하여 결사대를 조직하였고,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였다.
1919년 3월 말 대한국민의회에서 연락부장을 맡았다. 그해 5월 이후 무장투쟁을 본격적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 이때 회장 이명순, 부회장 박관일(朴貫一), 총무 서윤묵(徐允黙), 도재무 오현경(吳玄京), 서기 여남섭(呂南燮)·오종환(吳宗煥)·나정화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19년 7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이동휘·김립(金立) 등과 국내 진격작전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한국의 독립을 목적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결사대와 청년단 중 400여 명을 선발하여 하얼빈을 거쳐 국내로 들어갈 계획을 마련하였다.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문창범(文昌範)·홍범도(洪範圖)와 협의하여 명동학교·북일학교 학생으로 구성된 결사대 500여 명을 조직하였다. 이명순과 함께 무기 400여 정을 확보하고, 북일학교 교사 나복남(羅福南)이 지휘하는 결사대와 국내 진격을 계획하였다. 같은 해 9월 19일 훈춘현대한인국민회 총회를 개최하여, 국내 진격을 위한 군자금 모집과 결사대 조직을 논의하였다. 또한 이명순·박영호(朴永浩)·나정화는 총기 구입을 위해 9월 23일 니콜스크로 가서 25만 루블을 수령하고, 나복남은 결사대를 이끌고 국내로 진격하고, 홍범도·이용(李鏞)·채영(蔡英) 등이 결사대원 200여 명을 무장시킬 것을 합의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훈춘지역 독립운동 자금 모집을 감독할 담당자로 훈춘지방 검사장으로 임명하였다. 검사장은 재무원과 영수원을 감독, 자금 모집의 부정 규찰, 모집 불능자 처벌 등의 권한을 가졌다. 나정화와 함께 독립군 후원회를 결성하였다. 결사대원 중 전사자나 부상자가 발생할 경우 후원부대를 편성하기 위해 한인 5호당 1호의 결사대원을 선출하고 나머지는 후원대의 기능을 담당하게 하였으며, 마을마다 단장 1명, 재무원 1명을 선출하였다.
1919년 11월 10일 두도구(頭道溝) 기독교학교에서 열린 회의에서 임시정부와의 연계를 통한 국내 진입 계획, 무기 구입에 관한 논의를 하였다. 이때 훈춘지부의 의견을 모은 청원서를 임시정부에 보내기로 하였으며, 이를 위해 오주혁(吳周赫)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기관지로 『국민의회보』를 주 1회씩 발생하기로 하였고, 김덕한(金德漢)이 주필을 맡았다.
1920년 1월 두도구에 위치한 김학현(金學鉉)의 집에서 3월에 열릴 국제연맹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이 확실히 실현될 수 있다고 판단하고, 각 단체가 연합하여 의용군을 조직하고 무력에 의한 독립 쟁취가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이에 의용군이 조직되면서 군자금도 차등 있게 책정되어 조달하였다. 모집된 의용군이 1,300여 명에 달하자, 같은 해 1월 15일 왕칭현(汪淸縣) 군정서의 지휘를 받아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진격하고자 하였고, 훈춘 지방 세관출장소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2,000루블을 가지고 소련에서 총기와 탄약을 구입하여 일본과 중국 관헌의 체포를 피해 보관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군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에 납부하기로 하고, 그해 2월 10일 자택을 출발하여 러시아 삼차구(三差口)로 가서 이동휘·문창범과 임시정부에 어떻게 군자금을 납부할 것인지 논의하였다.
1920년 3월 18일 최용삼(崔龍三)과 함께 온성군(穩城郡) 장덕동(長德洞) 미산헌병감시소를 습격하여 일본군과 40분간 교전하였으며, 일제 헌병보조원에게 중상을 입히고 통신을 두절시켰다.
이후 병세가 악화되어, 1920년 6월 1일 투병 끝에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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