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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10269
성명
한자 池靑天
이명 李靑天, 池大亨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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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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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계열 광복군 포상년도 1962 훈격 대통령장

관련정보


2019년 09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992년 06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 일본육군중위가 되었다가 대한독립에 뜻을 두어 1916년 만주(滿洲)에 가서 양로군정서(兩路軍政署) 부속인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교성대장(敎成隊長)으로 있었음
2. 1920년 일본의 양협(兩狹)작전에서 반항하여 이를 격퇴하고 동년 12월 김좌진(金佐鎭) 장군과 합류하여 영안현(寧安縣)에서 서일(徐一)을 총대로 하는 대한의용군을 조직하여 여단장으로 활약함
3. 익년 정월 독립군의 부사령관이 되어 강양(崗陽) 일본군 수비대의 공격을 물리쳐 점령하고 소령(蘇領)으로 건너감
4. 소령에서 고려군관학교(高麗軍官學校)를 설립하고 독립군 양성에 노력 중 사상적 대립으로 (蘇)당국은 동년 6월 22일 독립군의 무조건 무장해제를 강요함에 6월 28일 장군은 민족적 절개를 지키기 위하여 항전 끝에 피체되었다가 석방됨
5. 1925년 1월 정의부(正義府)를 조직하여 군사위원장 및 조선의용군총사령관을 겸임하여 평안도(平安道) 일대의 일병을 소탕함
6. 1930년 홍진(洪陳), 신숙(申肅) 등과 한독당(韓獨黨)을 조직하여 군사위원장(軍事委員長)에 취임하고 동년 11월 독립군총사령관이 됨
7. 1932년 2월 18일부터 일본의 육공공격을 견디어 다음해 6월에는 대전자령(大甸子嶺) 전투에서 대첩(大捷)하여 다수의 전리품을 획득하였음
8. 하남 낙양(河南洛陽) 군관학교 특설반의 책임장교로서 동포의 군사교육에 힘씀
9. 1941년 중일전쟁(中日戰爭)이 일어나자 9월 17일에 장개석(蔣介石) 총통(總統)의 협력을 얻어 광복군총사령관에 추대되어 해방되기까지 활동
10. 1957년 1월 노환으로 서거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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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1988년 발간)

서울 종로(鍾路) 사람이다.

1906년에 서울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졸업하고 1908년에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大韓帝國陸軍武官學校)를 졸업하였으며, 1910년에는 일본 동경(東京)의 육군유년학교(陸軍幼年學校)를 졸업하였고 1912년에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그후 일본 육군에 임관되어 복무하던 중 1916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일본 육군 중위로 승진되어 청도(靑島) 전투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조국독립을 쟁취할 것을 결심하고 일본군을 탈출하여 만주(滿洲)로 망명하였다. 만주로 건너간 뒤, 봉천성(奉天省) 유하현(柳河縣) 합니하(哈泥河)에 있는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의 교관에 임명되어 학생들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하여 많은 독립군 간부를 양성, 배출하였으며 신흥무관학교의 교성대장(敎成隊長)을 역임하였다.

1920년말 청산리독립전쟁 이후 중·소 국경지대인 밀산(密山)에 모인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 대한국민회, 의군부, 혈성단 등 독립운동 단체들은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게 되었으며 그는 부사령관에 임명되어 이 대부대를 이끌고 소련령인 "이만시"로 이동하였다. 1921년 일르크츠크시에 주둔한 독립군은 다시 고려혁명군을 조직하고 소련정부의 협조를 받아 고려혁명군관학교(高麗革命軍官學校)를 설립하였으며, 그는 교장에 취임하여 독립군 간부급 인재를 양성하였다. 그러나 독립군의 이용가치가 줄어들자 소련정부는 약속을 위반하고 고려혁명군의 무장해제를 강요하자 이에 항전하다가 체포되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자유시참변"이다. 그는 임시정부의 강력한 항의로 석방되어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1923년 1월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자 그는 고려혁명군 대표로 이 회의에 참가하였으나 소위 창조론과 개조론 등으로 통일된 의견의 수합이 어려워지자 1924년에 신 숙, 김규식 등과 함께 국민위원회(國民委員會)를 구성하고 그는 군사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하기도 하였다.

1925년 만주로 귀환한 그는 길림주민회(吉林住民會), 의성단(義成團), 광정단(匡正團), 통의부(統義府) 등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하여 정의부(正義府)를 조직하고 군사위원장 겸 사령관에 취임하였다. 길림성(吉林省) 화전현(樺甸縣)에 본부를 두고 국내에까지 대원을 파견하여 일제의 각종 기관을 파괴하고 일관헌(日官憲)을 주살하였으며 무기를 노획하는 등 활발히 활약하는 한편으로 이념(理念)에 입각한 독립운동의 체계화를 위하여 고려혁명당을 창당하고 그 위원에 선출되었다.

1928년 2월에는 정의부, 참의부, 국민부의 3부 통합운동을 추진하였으며, 혁신의회(革新議會)의 군사위원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3부 통합운동이 단체본위와 개인본위 통합론으로 분리되어 실패하게 되자 그는 전민족유일당조직협의회(全民族唯一黨組織協議會)에 참가하였다.

1930년 김좌진이 암살 당하자 동년 7월 그는 한족자치연합회를 모체로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한국독립군을 조직하여 총사령에 취임하였으며 한·중연합군을 조직하여 무장항일 투쟁을 계속하였다.

1932년에는 중동철도 연선과 동빈현 등에서 적의 대부대와 조우전이 있었으며, 아성현(阿城縣)전투, 쌍성현(雙城縣)전투, 대전자(大甸子) 전투 등지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일제가 만주를 완전히 석권하게 되자 만주에서의 무장항일투쟁이 어렵게 되었으며, 1933년 그는 눈물을 머금고 수십 년간 항전하던 만주를 뒤로하고 산해관(山海關)을 넘어 중국본토로 들어갔다.

1933년 10월 그는 임시정부의 명령으로 하남성(河南省)에서 중국군관학교 낙양분교(洛陽分校)에 한인특별반을 창설하고 총책임자로 취임하여 교성대장에 이범석(李範奭), 교관에 오광선(吳光善), 조경한(趙擎韓) 등을 임명하고 상해(上海), 남경(南京), 천진(天津), 만주(滿洲) 등지에서 애국청년 90여명을 모집하여 군사훈련을 시켰다.

1934년에는 남경(南京)에서 "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하였으며, 다음해에는 민족혁명당 창당에 참여하여 군사국위원장에 취임하기도 하였다. 1938년에는 장사(長沙)에서 임시정부 군무부의 군사학 편수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어 조성환(曺成煥)을 주임위원으로 유동열(柳東說)·현익철(玄益哲)·이복원(李復源)·김학규(金學奎) 등 위원과 같이 군사학을 정리, 편수하였다.

또한, 1939년 10월 사천성(四川省) 기강(綦江)에서 열린 의정원(議政院) 정기의회에서 의정원의원 및 국무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1월에 국무회의에서 군무장(軍務長)으로 선임되어 입법·행정·군사에 대한 제반사항을 처리하는 중책을 맡았다. 이때 광복군 창설을 목표로 조성환(曺成煥)을 단장으로 하는 군사특파단을 조직하여 서안(西安)으로 파견하여 활동케 하였으며 다음해 2월에는 군무부에서 종래 경영하던 군사학 편수사업을 계속 발전시키기 위하여 군사학 편수위원회 주임위원으로 취임하여 이복원(李復源)·조경한(趙擎韓)·김학규(金學奎)·조인제(趙仁濟)·공진원(公震遠) 등을 위원으로 임명하고 이들을 지휘, 독려하여 군사학을 편수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중국 국민정부와 협정을 체결하고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전례식(成立典禮式)을 중경(重慶) 가릉빈관(嘉陵賓館)에서 거행하였는데 이때 그는 총사령으로 임명되었으며 참모장 이범석(李範奭), 부관장에 황학수(黃學秀) 등이 임명되었다. 동년 11월에는 이범석과 같이 중국 당국과의 협정문제를 해결키로 하고 총사령부를 서안(西安)으로 이전하게 되었으며, 총사령관대리에 황학수, 참모처장대리에 김학규 등을 임명하고 간부 200여명과 함께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으로 가서 구체공작을 준비하고 진행케 하였다. 1941년에는 지대(支隊)를 편성하고 각지에 파견하여 사병모집 및 훈련, 선전과 정보 수집, 적정 정찰, 유격전 전개 등의 임무를 수행케 하였는데 제1지대장 이준식(李俊植)은 산서성(山西省) 대동(大同)에서, 제2지대장 공진원(公震遠)은 수원성(綏遠省) 포두(包頭)에서, 제3지대장 김학규(金學奎)는 안휘성(安徽省) 부양(阜陽)에서, 제5지대장 나월환(羅月煥)은 서안(西安)에서 각각 활동케 하여 다대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또한 중국 중앙군 및 주중연합군(駐中聯合軍)과 긴밀한 연락 및 협조를 취하여 항일전을 전개하고 국내 진입 작전을 준비하던 중, 일본군의 항복으로 광복을 맞이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143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8권 103·758·830·896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2권 457·514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3권 51·242·261·279·474·514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304·308·309·313·316·500·512·516·821·840·856·867·869·870·873·883·898·899면
  •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241·243·244·245·249·251·258·259·261·266·268·270·279·280·281·304·306·307·308·312·399·408·409·422·425·460·520·524·531·535·546·547·587·588·596·602·633·634·636·689·723·772·77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9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33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180·293·294·410·413·417·422·485·498·499·571·572·578·579·599·623·624·626·627·642·667·680·681·688·692·696·697·69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41·45·47·48·49·70·112·119·120·127·143·146·147·148·149·160·161·170·172·186·192·194·195·200·205·216·272·273·297·307·310·311·324·327·330·344·458·471·487·530·544·559·568·571·572·583·586·596·607·625·626·630·635·636·639·643·666·677·687·688·73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362·776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9권 368면
  • 국외용의조선인명부(총독부경무국) 215면
  • 조선통치사료(한국사료연구소) 470·477·495·496·497·498·499·503·504·505면
  • 사상정세시찰보고집 237면
  • 사상정세시찰보고집(기2) 22·426면
  • 고등경찰요사 117·118·119·125·126·127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55·256·269·271·274·275·276·279·286·320·321·347·348·349·356·357·358·361·366·369·370·371·372·377·378·391·392·394·422·427·442·477·487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506·515·518·521·522·523·527·537·538·540·545·549·553·554·555·570·571·576·577·579·580·582·585·587·588·589·590·591·594·598·599·600·601·602·603·612·613·614·631·642·643·644·645·648·656·663·667·668·669·671·674·689·697·700·704·705·706·711·740·743·961·974·1053·1054·1058·108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668·669·670·681·695·701·709·710·719·721·723·724·725·728·732·734·735·746·750·769·774·775·776·791·795·805·848·883·887·891·897·902·903·915·920·928·936·949·954·966·968·980·1009·1035·1042·1048·1067·1068·106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61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863·864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1권 828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2권 20·30·35·84·254·334면
  • 한국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 5권 66·76·77면
  • 조선민족운동연감 150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79면
  • 기려수필 425·426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52·53·55·99·100·101·102·104·105·135·139·151·156·157·172·195·196·201·205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3권 383·508·519·5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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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지청천 본명 : 석규(錫奎) · 대형(大亨), 아명 : 수봉(壽鳳), 이명 : 지대영(池大永) · 지청천(池靑天) · 이청천(李靑天), 지용기(池龍基), 이중용(李重鏞), 호 : 백산(白山) 서울 -
본문
1888년 (음)1월 25일 서울 삼청동(三淸洞)에서 아버지 재선(在善)과 어머니 경주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충주(忠州)이다. 본명은 석규(錫奎) 또는 대형(大亨)이라 하였다. 아명은 수봉(壽鳳)이다. 독립운동에 투신하면서 일제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많은 이명을 사용하였다. 일본육군사관학교 재학 당시 석규였으나, 호적 본명은 대형(大亨)이다. 망명 후에 지용기(池龍基)와 지청천(池靑天)이라 하였다. 광복 시까지는 외가 성을 따른 이청천(李靑天)을 사용하였으며, 1948년 12월 본명은 지대형으로 복명하였으나, 일반적으로 ‘청천’으로 알려졌기에 1950년 1월 지청천으로 개명하였다. 호는 백두산을 의미하는 백산(白山)이다.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열 살이 되던 해인 1897년에 다니던 한문 서당을 그만두고 관립교동소학교(官立校洞小學校)로 편입하여 졸업하였다. 1904년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공부하던 중에 황성기독교청년회의 비밀회합에 참가한 사실이 드러나, 신교육을 반대하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배재학당을 그만두었다. 청소년 시절에 을사조약 강제 체결로 주권이 위태로워지자 힘을 길러야 한다고 결심하여 1907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다. 그해 8월 1일 한국 군대가 해산된 데 이어 1909년 9월 육군무관학교마저 폐교되자, 일본육군사관학교에서 선진 교육을 받아 군인이 되고자 대한제국 정부가 파견하는 교육생 42명 중 한 사람으로 선발되었다. 1909년 12월 일본 육군중앙유년학교 예과 3학년으로 입학하여 소정의 교육과정을 마치고 1912년 5월 졸업하였다. 6개월간 부대 부속 근무를 마치고 그해 12월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년 6개월의 교육과정을 마치고 1914년 5월에 제26기로 졸업하였다. 일본 육군보병 10연대, 이른바 ‘히메지(姬路)연대’의 10사단 소위로 임관하여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5년 중국 칭다오(靑島)로 파병되었다. 일본군과 독일군 간의 ‘청도전투(靑島戰鬪)’에 참전하여 실전 경험을 쌓았다. 일본 보병 중위로 복무하던 1919년 2월, 일본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이 있었고 국내에서 거족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난 소식을 듣고 독립운동에 뛰어들기로 결심하였다. 6개월간의 장기 휴가를 얻어 그해 6월 귀국하였다. 기회를 노리던 중, 일본육군사관학교 1년 선배인 김경천(金擎天)과 6월 6일 망명을 결행하였다. 군복을 벗고 양복으로 갈아입은 후 자동차로 수원까지 와서 야간에 수원역에서 신의주행 1등석 기차를 타고 다음날 아침 신의주역에서 내렸다. 역 인근의 관성여관에 묵으면서 중국 안둥현(安東縣)으로 가는 여행권을 구하였다. 국경을 넘기까지 김경천과 따로 행동하면서 열차편으로 압록강 건너 안둥현 상역에서 하차하였다. 인력거를 타고 예약해 둔 중국인 집에서 다시 김경천과 만났다. 망명 당시 최신 병서와 군용지도를 품에 숨기고 있었다고 하는데, 일본인 행세를 했기에 국경 경계자들의 감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증국인 복장을 하고 하루에 50~60리를 행군하며 15일 만인 6월 21일경 서간도 류허현(柳河縣) 고산자진(孤山子鎭) 대두자(大肚子)에 도착하였다. 군정부(軍政府)에 참여하였으며, 신흥무관학교 교관 겸 교성대장(敎成隊長)에 선임되어 독립군 양성에 전력하였다. 이때부터 이청천이라는 이명을 사용하였으며, 만주에서는 경천(擎天) 김광서·동천(東天) 신팔균(申八均)과 함께 ‘만주 3천(滿洲三天)’이라 불리며 이름을 떨쳤다. 1919년 11월 서간도의 군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면서 군정부의 명칭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개칭하면서 총사령관에 취임하였다. 1920년 8월 신흥무관학교 학생 100여 명과 서로군정서 병력을 이끌고 북로군정서 병력과 함께 독립군 연합부대를 편성하고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한편 1920년 러시아 연해주 일대에서 일제가 ‘4월 참변’을 일으키자 한인무장세력들은 원동공화국의 관할지역인 아무르주로 이동하였고, 간도의 독립군들도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러시아령 아무르주의 스보보드니(Svobodny), 이른바 ‘자유시(自由市)’로 이동하였다. 1921년 6월 28일 새벽, 칼란다리시빌리(Nestor Kalandarishvili)가 지휘하는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과 자유대대는 수라세프카(Cypажевка)역 주변에 주둔한 독립군들의 무장해제를 감행함으로써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이 초래되었다. 현장에서 살해되고, 공격을 피하려 제야(Zeya)강에 뛰어들어 익사하거나 행방불명된 이들이 600여 명에 이르렀다. 포로가 된 900여 명의 독립군들은 이르쿠츠크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고 아무르강 연안의 우수문정거장 부근 목재소에서 강제 노역에 처해지는 비극적 상황이 전개되었다. 간신히 우르깡 금광지대로 피신한 그는 소련정부 소속의 제5군단 산하 1개 여단으로 편성된 고려혁명군과 함께 고려혁명군특립연대로 편입되었다. 이후 이르쿠츠크로 와서 고려혁명군 부설로 창설된 고려혁명군관학교 교관에 임명되었다. 1921년 10월 15일에는 유동렬(柳東說)에 이어 제2대 교장에 취임하였다. 당시 이르쿠츠크 공산당 측으로부터는 민족주의 성향자로 분류되어 경계 대상이었다. 1922년 6월 고려혁명군정청이 설립되면서 군관학교는 폐교되었다. 1923년 1월 3일부터 고려혁명군특립연대 대표로 상하이(上海)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여 군무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새로운 정부 건설을 주창한 창조파 입장에 섰다.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되자 창조파 세력과 함께 새 정부 수립을 위해 8월 하순경 블라디보스토크로 왔다. 이르쿠츠크 공산당 대표 네리미를 만나 한인무장대를 조직하고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해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이르쿠츠크 공산당 측에서는 한국독립군들이 먼저 공산당원이 되어 러시아로 귀화하여 소련의 정규군으로 편성된다면 무장대를 편성해 주겠다는 뜻을 표시하였다. 이에 따른 독립군 대표들의 회의를 주도하였지만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1923년 9월 1일 일본 관동대지진으로 한인들이 학살당한 소식이 전달되자 9월 27·28일 이틀간 니콜리스크 서남방 4리 반 정도 떨어진 한인부락 신곡개(新谷開)에서 열린 회의에서, 관동대지진은 하늘이 준 천재일우의 호기이므로 소이(小異)를 버리고 대동을 취하여 소비에트 공산당의 원조를 받아 무기와 식량을 공급받아 전쟁을 결행하자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1924년 1월 29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국민위원회를 열고 정부 수립을 논의하였으나, 스탈린 정권은 국민위원회를 해산시켰다. 자유시참변에서 독립군의 무장 해제를 경험하였고, 소련정부가 한국의 독립투쟁을 외면하자, 독립군들을 이끌고 만주로 돌아왔다. 1924년 3월 10여 독립군 단체를 모아 전만통일회의주비회 조직을 주도했으며, 그 결과 11월에 화뎬현(樺甸縣)에서 정의부(正議府)가 출범하였고, 중앙행정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8년에는 체포된 오동진(吳東振)의 후임으로 정의부 사령관에 임명되었으며, 1929년 정의부 군사부장에 임명되었다. 1928년 8월 제5회 정의부 중앙의회에 참가하여 민족유일당 조직 방안에 대해 토의하며 참의부(參議府)‧신민부(新民府) 등과 3부 통합운동을 주도하였다. 3부 통합운동의 결과, 민족유일당 조직 동맹을 바탕으로 조선혁명당이 창건되었다. 한편 1929년 9월 조선혁명당 산하의 교민 자치기관으로서 지린(吉林)에서 새로이 출범한 국민부(國民府)의 참모장으로 선임되었다.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고 만주국을 세우자 한국독립군 총사령관으로 중국의 길림구국군(吉林救國軍)과 연합작전을 펼쳐 1932년 9월에 쌍성보전투(雙城堡戰鬪)와 1933년 6월 말 대전자령전투(大甸子嶺戰鬪)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만주국을 세운 일제에 의한 만주지배가 공고화되고, 한·중 연합군 간에 내분이 일면서 한국독립군·한국독립당 지도부는 중국 관내지역 이동을 결정하였다. 이후 한국독립군을 이끌고 뤄양(洛陽)으로 이동하여 중국군관학교 낙양분교(洛陽分校) 내에 설치된 한인특별반 운영에 합류하였다. 총교도관에 임명되어 한인청년의 군사훈련 총책임을 맡았으나, 한인특별반의 존재를 탐지한 난징 일본총영사관은 중국정부에 한인특별반의 폐쇄와 한인 독립운동 지원을 중지해 줄 것을 집요하게 요구하여 1935년 4월 62명의 졸업생 배출을 끝으로 문을 닫게 되었다. 1934년 홍진·김원식 등 재만 한국독립당 대표와 성주식·윤기섭 등 난징에 본거지를 둔 한국혁명당 대표들이 결성한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에서, 군사위원회 주임으로 선임되어 ‘청년군사간부특훈반’의 총책임자로서 군사훈련을 지도하였다. 아울러 독립운동 진영의 단결과 조직 통일을 목적으로 출범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에 신한독립당 대표로 참여하여 1935년 7월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 결성을 주도하였다. 이후 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및 군사부장에 선임되어 활동하였으나 김원봉을 중심으로 한 의열단계가 당권을 장악해 나가자 한국독립당계가 먼저 탈당하였다. 이후에도 김원봉계가 당권을 확대해 가자 1937년 3월 29일 민족혁명당 비상대회 선언을 발표하여 김원봉의 전횡을 비판하였다. 이로 인해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제명처분을 받자, 탈당하여 4월 말 조선혁명당을 출범시켰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1937년 7월 16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군사위원회의 군사위원으로 선임되었고, 군사학편수위원회 위원장직을 맡았다. 8월 17일 조선혁명당·재건 한국독립당·한국국민당 등 민족주의 진영의 3당은 효과적인 대일항전의 태세를 갖추기 위하여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하였다. 1939년 5월 임시정부가 치장(綦江)에 도착한 후 10월 25일에 열린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임명되었고 군무부장에 선출되었다. 이어서 1940년 8월 4일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출범에 앞서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9월 15일, 마침내 한국광복군 창건 사실을 내외에 공포하고 9월 17일에 충칭(重慶) 자링빈관(嘉陵賓館)에서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식을 거행하였다. 광복군은 군사특파단원을 중심으로 1·2·3지대를 편성하고, 시안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광복군으로 편입시켜 제5지대로 편제하였다. 그 결과 1지대는 산시성(山西省) 다통(大同), 2지대는 쉐이위앤성(綏遠省) 바오토우(包頭), 3지대는 안후이성(安徽省) 푸양(阜陽), 5지대는 산시성(陝西省) 시안을 중심으로 초모활동에 나섰으며 또한 장시성(江西省) 상라오(上饒)에도 대원을 파견하여 공작활동에 나섰다. 아들인 지달수와 딸 지복영도 적후 공작에 참여하였다. 그러던 중 조선의용대 일부 병력이 화북으로 이동한 사건이 일어나자, 중국정부는 1941년 10월 30일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대를 동시에 군사위원회에 예속시키고 참모총장이 직접 통일 장악하여 운용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한국광복군 행동 9개준승’을 임시정부에 통고하였다. 임시정부는 중국 측을 상대로 ‘9개준승’ 철회 교섭을 벌였으나 1944년 9월 8일에 이르러서야 국민당정부는 9개 준승을 취소하고 한국광복군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소속시켰다. 10월에는 광복군 총사령부 조직조례 및 지대 편제표를 마련하였고 광복군의 독립적인 조직체계가 확립되었다. 한편 연합군과의 공동작전을 추진에 주력하여, 미국 전략첩보국(OSS)과의 한미합동작전을 성사시켜 1945년 5월부터 시안의 광복군 제2지대와 푸양의 제3지대 대원들이 3개월간 합동 훈련을 하고 8월 4일 제1기생 훈련을 마쳤다. 김구와 함께 미국 측 책임자인 도노반(William B. Donovan)소장을 만나, 한·미 합동 국내진입작전을 추진하는 데 합의하고 작전 수행을 준비하던 중 일제의 항복 소식이 전해지면서 실현되지 못하였다. 광복 이후 한인청년들을 광복군에 편입시켜 상하이·한커우·베이징·항저우·난징·광저우 등지에 잠편지대(暫編支隊)를 편성하며, 광복군의 조직을 확대하였다. 해방 직후인 1945년 11월 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화(駐華)대표단의 대표를 맡아 임시정부 요인들의 환국 이후 남은 업무 처리, 중국내 한인 동포 보호와 임시정부 계열 인사들의 생활보장 문제, 환국문제 처리, 광복군 훈련과 일본군내 한인 사병의 편입을 통한 확군, 임시정부를 대신한 중국 정부와의 교섭·연락 등의 중책을 맡았다. 1947년 4월 21일 귀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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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묘지 서울현충원 서울특별시 동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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