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훈전자사료관

통합검색
독립유공자 명단보기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100007
성명
한자 Stanley Haviland Martin
이명 S.Martin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독립운동지원 포상년도 1968 훈격 독립장

관련정보


2021년 09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913년 이래 중국(中國) 길림성(吉林省) 용정(龍井)에서 제창병원(濟昌病院) 원장(院長)으로 의료선교활동을 하던 중 1919년 3월 13일 독립만세운동으로 인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이들을 동 병원(病院)으로 이동시켜 치료하고, 희생자를 위한 대규모 장례식을 개최하였으며, 또한 병원 및 부속건물을 한인독립운동가들에게 집합‧숙박 또는 독립운동 선전물 인쇄를 위한 장소로 제공함.
1920년 10월 장암동(獐巖洞)경신참변(庚申慘變)의 피해지역을 방문하여 한인의 피해상황을 조사‧촬영하고, 희생자 유족을 위로하는 예배를 열고 조의금을 전달하였으며, 보고서를 작성하여 캐나다 토론토시 장로파 전도본부에 전달『토론토그로브』(紙)에 보도하게 하는 등 일본군의 잔인한 살상행위를 국제사회에 폭로함.
원문보기 한자보이기

 

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1916년 캐나다장로회 소속으로 한국에 왔다.

1919년 3월 13일 용정에서 한인들이 독립선언식을 갖고 만세시위를 했다. 중국군이 출동하여 시위대를 향하여 발포했다.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기수 박문호(朴文浩)를 비롯한 13명이 현장에서 총에 맞아 사망했다. 치명상을 입은 4명은 병원으로 옮겨 치료받던 중 사망했으며, 중상자 18명을 비롯한 3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들 사상자들은 모두 캐나다장로회 선교부의 선교병원인 제창병원으로 옮겨졌다.

한국독립운동에 호의적이었던 병원장 마틴은 사망자의 시체는 병원 지하실에 안치하게 했다. 의료진과 함께 부상자들을 정성껏 치료해 주고, 사망자들을 위한 합동 장례까지 치러주었다. 그는 그 후에도 제창병원과 그 부속건물들을 자주 독립운동을 모의하기 위한 독립운동가들의 집회장소와 숙박소로 제공해 주었다. 여기서 독립사상을 고취하기 위한 각종 문서들이 등사판으로 인쇄되어 배포되었다.

이러한 그의 한국독립운동 지원에 감사하여 간도 대한국민회는 1920년 2월 이를 표창하는 기념패를 제작하여 그에게 수여하였다. 1920년 10월 간도를 침공한 일본군에 의한 경신참변이 일어났다. 마틴은 일본군의 협박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그 병원 간호사와 함께 1920년 10월 말경 일본군의 방화 학살 현장을 방문하여 사진을 촬영했다. 이때의 견문을 바탕으로 ‘노루바위(장암동) 학살 사건’이라는 보고서를 만들어 일본군의 학살 만행의 진상을 폭로하였다.

1927년까지 제창병원 원장으로 있었다. 그해 서울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 겸 부속병원 의사로 임명되어 임지를 서울로 옮겼다. 이곳에서도 흉부외과 과장과 세브란스결핵병방지회장을 맡아 한국인 특히 청년층의 고질병인 폐결핵의 퇴치에 힘썼다.

1940년 가을 일본과 미국 사이에 전운이 감돌왔다. 미국과 영국 영사관은 선교사들 특히 여성과 아이들의 철수를 강력하게 권고했다. 미국 정부는 자국민 철수를 위해 마리포사(The Mariposa)호를 인천항에 보냈다. 11월 16일 대부분 선교사와 그 가족들로 이루어진 219명이 이 배를 타고 한국을 떠났다. 캐나다 국적인 그도 부인과 함께 이 배에 승선할 수 있었다. 이는 그의 부인이 미국인이었기 때문이었다. 1941년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몬드(Richmond)에서 별세하였다.

정부는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PEKING&TIENTSIN TIMES(1920. 12. 9)
  • 한국민족운동사료(韓國民族運動史料)(국회도서관, 1977) 제3권 46~47, 531~532면
  • 간도(間島) 및 혼춘지방(琿春地方) 재주(在住) 조선인(朝鮮人)과 야소교(耶蘇敎)의 관계(조선총독부 경무국:1920. 3)
  • 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국사편찬위원회, 2007) 제43권 464면
  • 야소교장로파(耶蘇敎長老派) 부속(附屬) 병원장(病院長)에 대(對)해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로부터 기념패증정에 관한 건(국자가 분관주임:1920. 12. 18)
  • 간도출동(間島出動) 제국군대(帝國軍隊)의 행동에 대한 비난변박재료(非難辯駁材料) 취조(取調)에 관한 건(외무차관:1921. 2. 5)
  • 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김정명, 1967) 제2권 1039면
  • 일본(日本)의 한국침략사료총서(韓國侵略史料叢書)(한국출판문화원, 1990) 제29권 127면
  • 한국사(국사편찬위원회, 2001) 제48권 245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스탠리 해빌랜드 마틴 - 캐나다 뉴펀들랜드(Newfoundland) 3.1운동, 경신참변
본문
1870년 7월 23일 캐나다 뉴펀들랜드(Newfoundland) 세인트존스(St. Johns)에서 태어났다. 온타리오(Ontario)의 퀸즈대학교(Queen’s University)에서 의학을 전공하여 의사가 되었다. 1916년 부인과 함께 캐나다장로회 의료선교사로 내한하여 북간도 용정선교지부에 파송되어 선교활동을 하였다. 용정을 중심으로 하는 북간도 지역에는 1900년을 전후하여 이 지역에 이주하였던 김약연(金躍淵)‧문치정(文治定)‧김영학(金永學)‧구춘선(具春善)‧마진(馬晉)‧박무림(朴茂林) 등 민족지도자들이 기독교로 집단 개종하여, 교회와 학교를 세워 민족운동에 힘쓰고 있었다. 이 지역의 교회들은 1910년 일제의 한국 강제 병탄 이후 급격히 성장하였다. 특히 1911년 2월 성진에서 조사로서 활동하던 이동휘(李東輝)가 이 지역에 파송되어 사경회를 인도하고 이를 계기로 조직된 삼국전도회를 중심으로 교회와 학교를 설립하는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러자 그 지역의 선교를 맡았던 캐나다장로회 선교부는 1912년 가을 선교본부에서 파송된 맥퍼슨 스코트(J. Mcpherson Scott) 목사를 대동하고, 바커(A. H. Barker; 朴傑)‧맥도날드(Macdonald)‧럽(Robb) 선교사가 북간도 지역을 여행하고, 용정에 선교지부를 건설할 것을 본국 선교부에 요청하여 즉시 허가를 받았다. 김약연‧계봉우(桂奉瑀)를 비롯한 북간도 각 교회 대표들도 그해 11월 4일 연명으로 캐나다선교부에 「청원서」를 보내, ① 목사(선교사) 파송, ② 전도인 추가 파송, ③ 중학교 설립, ④ 병원설립을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1913년 6월 바커 선교사 가족이 용정으로 이주하여 용정지부를 설립하였다. 이 용정지부에 의료선교사로 마틴 부부가 1916년에 부임함으로써 용정지역에서도 의료 선교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진료소로 시작하였으나, 그해 11월에 착공한 병원건물이 1918년에 완성되어 현대식 병원으로 발전하였다. 이 병원이 제창병원(濟昌病院, St. Andrew Hospital)으로 30개의 병상을 갖춘 현대식 건물과 남녀 입원실, 수술실, X선 촬영실 등을 갖추고 있었다. 병원 중앙 건물 좌측에는 외래환자 진료소가 있었고, 우측에는 남자병동, 그 뒤에 여자병동이 있었으며, 여자병동에 이어 간호사 숙소가 있었다. 의료진으로는 병원장 마틴 외에 한국인 의사 1명, 간호사 2명, 약제사 1명, 그리고 부인이 간호부장으로 함께 일하였다. 국내의 만세운동 소식이 북간도에 전해지고, 3월 7일 저녁에는 국내에서 발표된 독립선언서가 도착하였다. 1919년 3월 13일 정오 용정의 서전(瑞甸) 대야(大野)에서 ‘독립선언 축하회’가 개최되었다. 식장에는 대회장인 김영학(金永鶴), 회장 구춘선 장로, 부회장 배형식(裵亨湜) 목사를 비롯한 북간도 지역 민족지도자들이 대거 참석하였다. 김영학의 독립선언서 낭독에 이어 연설이 있었고, 만세시위대는 ‘정의인도’라고 쓴 대형 깃발을 앞세우고 태극기를 흔들며 시내를 행진하였다. 이때 일제의 사주를 받아 시내 진입을 저지하려던 중국군이 시위대를 향하여 발포하여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이날 시위에서 발생한 사상자들은 모두 캐나다장로회 선교부의 선교병원인 제창병원으로 옮겨졌다. 한국독립운동에 호의적인 병원장으로서 사망자의 시체는 병원 지하실에 안치하게 하고, 의료진과 함께 부상자들을 정성껏 치료해 주는 한편 사망자들을 위한 합동 장례까지 치러주었다. 이후에도 한국인의 독립운동에 대해 매우 호의적이었다. 그리하여 그의 지지와 협조 속에 제창병원과 그 부속건물들이 자주 독립운동을 모의하기 위한 독립운동가들의 집회장소와 숙박소로 이용되었다. 그리고 독립사상을 고취하기 위한 각종 문서들이 이곳에서 등사판으로 인쇄되어 배포되었다. 이러한 한국 독립운동 지원에 감사함을 느낀 간도 대한국민회가 표창기념패를 제작하였고, 1920년 2월에 수여받았다. 1919년 만세운동 이후 활발해진 만주 지역의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1920년 10월 간도를 침공한 일본군은 같은 해 12월 말까지 그 지역 한인촌에 대한 대대적인 방화‧학살을 자행하였다. 당시 용정의 제창병원 원장으로 있으며, 일본군의 협박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병원 간호사와 함께 1920년 10월 말경 방화 학살 현장을 방문하여 사진을 촬영하고, ‘노루바위(장암동) 학살 사건’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만들어 일제가 자행한 학살의 진상을 폭로하였다. 이후 1927년까지 제창병원 원장으로 있다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 겸 부속병원 의사로 임명되어 임지를 서울로 옮겼다. 이곳에서도 흉부외과 과장과 세브란스결핵병방지회장을 맡아 한국인 특히 청년층의 고질병인 폐결핵의 퇴치에 힘썼다. 그리고 연구 결과를 언론에 기고하거나 강연 저술을 통하여 공유하였다. 그러다가 1940년 가을 일본과 미국 사이에 전운이 감돌자, 미국과 영국 영사관은 선교사들 특히 여성과 아이들의 철수를 강력하게 권고하였다. 미국 정부는 자국민 철수를 위해 마리포사호(The Mariposa)를 인천항에 보내었고, 11월 16일 이 배를 타고 부인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갔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감사의 글 Total 0
목록 개수

인쇄 목록
  •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십시오.
  • 이용자의 참여가 사이트 가치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는 정부포상 결정당시의 ‘공적조서’를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공적조서상 근거정보를 기본바탕으로 전문가의 원고집필을 통해 발간된 책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공적개요(공적조서)과 공적내용(공훈록)’은 원칙적으로 수정불가하며,
  • 다만,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기본정보(성명, 생몰일자, 본적지)에 대한 사항은 ‘오류신고’를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페이지 별 오류신고
화면(사료)위치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 스탠리 해빌랜드 마틴(관리번호:100007) 오류 유형 *
오류 제목 *
오류 내용 *